[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홍산 기독교 발원지이자 객사 옆 영험한 은행나무가 지켜주는 ‘북촌2리’
[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홍산 기독교 발원지이자 객사 옆 영험한 은행나무가 지켜주는 ‘북촌2리’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5.1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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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13편:홍산면 북촌2리

■ 마을 유래 및 개요
북촌2리는 북촌1리와 홍산자율방범대에서 홍산 119안전센터까지 북촌로 길을 경계로 하고 북촌3리와는 홍산천을 경계로 하고 있다. 양 마을 중간에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짧으며 남쪽에 마을이 형성돼 있고 북쪽으로 마을의 4/1정도가 농지로써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북촌2리 전경
북촌2리 전경(뜨래마루 제공)

백제 때는 대산현이었으며 통일신라, 고려 때에는 백제 멸망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씨족이 탄생하고 부활을 꿈꾸며 숨죽이던 마을이었다. 고려 초기에 홍산순씨가 처음 새로운 성씨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이후 창원황씨가 정착한 것이 북촌리에 마을이 들어선 시초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 행정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 군청 북쪽이 되므로 북촌(北村)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좌촌(坐村), 여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북촌리라 칭하고 하촌(하북)을 북촌2리로 분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리의 면적은 1.60㎢다.
4월13일 삼용리 복사꽃과 내산초등학교 벚꽃을 보며 꽃에 취한 듯, 봄에 취한 듯하면서 북촌2리에 도착했다.

■ 회관 – 송덕비 – 관문리 표지석

북촌2리 마을회관이다
관문리 표지석이 있고 그 뒤쪽으로 마을회관이 보인다

먼저 마을회관에서 유진경 이장(이하 유 이장)을 만나면서 4월9일 마을의 구석구석을 돌며 답사해 많은 도움을 준 박양수옹을 다시 만났다.
마을회관은 삼각형으로 난 길 가운데에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회관 입구 문 위에 경찰 출신이 쓴 ‘장수촌’이라는 현판을 보니 이 마을은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회관 앞마당 한가운데 비(碑)가 있고 남쪽으로 가는 길 가운데는 유선방송 철 기둥이 있으며 그 옆에 재활용 분리수거함과 표지석이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자니 이런 형국으로 어수선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유가 있다. 원래 동쪽으로 들어오는 길과 남쪽으로 들어오는 길이 회관 마당의 비와 만나게 되는데 이를 선으로 그어 남동쪽 지역이 화단이었다. 이 화단을 없애고 포장을 하다 보니 마당에 3개의 섬이 자연적으로 생기게 된 것.

먼저 섬1인 비에 대해 알아봤다.
‘정곡 서창손선생 송덕비’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1987년에 세워진 이 비는 서창손이라는 사람이 마을회관 부지를 희사한 것에 대해 주민들이 찬양한 뜻을 담고 있다.
다음 섬2는 유선방송 철 기둥이다. 유 이장은 교통에 방해가 되고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철거를 건의하겠다고 한다.
마지막 섬3은 표지석이다. ‘북촌2리 관문리’라고 써진 표지석의 말은 원래 이곳에 7개 마을 있었는데 북촌2리는 홍산 관아로 들어가는 입구라서 ‘관문’이고 여기에 마을 ‘리’를 붙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표지석에서 은행나무 방향에 또 다른 ‘관문리’ 표지석이 누워 잠자고 있다. 현재 세워진 표지석의 전 표지석이다.
이 3개의 섬으로 인해 어수선한 구조를 어떻게든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밀알선교 – 이범석 장군 기숙집 – 자라보통들 - 한국농어촌공사 배수장 - 만덕교

116여년전 홍산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장소로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밀알선교’라고 쓰여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배수장이다
한국농어촌공사 배수장 뒤에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3호로 지정된 만덕교다

회관에서 북서쪽으로 사거리가 있는데 이곳에 파란색 지붕의 집이 있다. 이 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밀알선교’라고 써진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곳이 116여년전 홍산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장소로 1950년 기독교 장로교회와 예수교장로교가 분파돼 동아다실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가 북촌3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홍산중앙교회’로 신축이전했다.이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옥이 끝나는 지점 왼쪽에 오래돼 보이는 집이 있다. 워낙 날아서 현재 거주는 하지 않지만, 과거 초대 국무총리이자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장군’이 1947년3월 방문해 기숙했던 개인 집이다.
이 집 옆에 공터가 있는 데 과거 방앗간이 있던 곳이다.
이 길에서 북쪽으로 직진해 올라가면 2차선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인데 이 2차선 도로 건너 넓은 경지정리 구역이 ‘자라보통들’이라고 한다. 자라보통들은 1987년 경지정리 되기 전에는 들 중심으로 하천이 곡선으로 흘러 전체적인 지형이 자라 모양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 2차선 도로를 따라 직진하면 왼쪽으로 홍산천과 평행하게 간다. 가다가 복개천 전 오른쪽으로 ‘한국농어촌공사 배수장’이 있다.

이 배수장 뒤편 후미진 곳에 옛 홍산 관아의 관문인 ‘만덕교’가 있다.
만덕교는 충청남도 기념물 3호로 지정된 ‘만덕교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비문은 이복형이 지었고, 글씨는 우정구가 썼다. 이 다리는 홍산객사 동쪽에 1681년 첨지 서덕해가 다리를 만든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덕교지비’를 세웠다. 만덕이라 교명은 이 다리로 인해 만인에게 덕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후 홍교(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무너져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통행케 해 불편이 크던 중 1869년 천총 서유형이 석교개건을 발의해 다리를 완성하고‘만덕교 개건비’를 다시 세웠다. 1946년 대홍수 때 다시 허물어져 잔석만 일부 남고 나머지는 유실돼 마을의 빨래터 등으로 사용되다 1987년 정필모 부여군수가 선현의 유적을 소중히 여기고 잔석과 석재를 보완해 원형대로 복원했다. 만덕교에서는 정월이면 다리 건강을 위해 다리를 왕복 운동하는 ‘다리 밟기’를 했다. 홍교인 만덕교는 길이 약 12m,폭 3.5m이다.

■ 사금 공장 – 자전거포 - 홍산수레제작공작소 - 태평양 양복점 - 홍산인쇄소 - 비홍여관
만덕교에서 나와 배수장 앞 도로에서 서쪽으로 가면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과 배수장 사이쯤 옛날에 금을 제련하던 공장이 있던 자리다. 공장이 있게 된 까닭은 경지 정리하기 전 굴곡진 홍산천에서 사금이 나왔기 때문이다. 공장까지 갖춘 것을 보니 사금이 꽤 많이 나왔다는 의미일 게다.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정제 약품을 쓰는 데 이 약품이 독했던 것 같다. 공장 주변에는 농작물이 자라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정제약품을 써서 그렇게 됐다고 추측한다.
이 공장터에서 조금 가면 사거리이고 좌측 길로 가면 또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좌측 길로 조금 내려가면 두 번째 건물인 왕궁성 중화요리가 있는데 이곳이 최씨가 먼저 백씨가 후에 1940년부터 1970년대까지 운영하던 ‘자전거포’자리다. 일제강점기 엄복동 선수가 자전거 대회에서 매번 일본 선수를 제치고 우승해 전국에 자전거 열풍이 불었는데 홍산에도 그 열풍이 불었던 것. 그 덕에 홍산에 3개의 자전거포가 생기게 됐다.
여기서 조금 지나 두 번째 보광당이라 쓰여 있는 건물 인근이 옛날 ‘홍산수레제작공작소’였다. 백씨가 2발, 4발 우·마차를 1930년초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만들었다.
여기서 뒤돌아 왔던 사거리를 직진해 올라가면 사거리에서 세 번째 붉은 벽돌의 건물이 홍산 최초의 양복점인 ‘태평양양복점’이 있던 자리다. 1930년 말경부터 박씨가 재단사를 두고 운영하다 1940년 중반 폐업 후 양복수선집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 바로 옆 홍산보부상 저산팔읍상무사라고 쓰여 있는 벽이 있는 자리가 과거 ‘홍산인쇄소’였다. 홍산 최초이자 유일한 이 인쇄소는 1930년 중반부터 이씨가 운영하다 6·25사변 후 직원이던 장씨가 인수해 1970년 초까지 이끌었다. 장씨의 아들인 장석철은 공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여기서 바로 옆 초가집 몇 채와 보부상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의 건물이 과거 ‘비홍여관’ 자리다. 이씨가 1940년 초부터 6·25사변 전까지 운영한 후 정씨와 김씨가 합작해 ‘비사표’상표를 내건 ‘비홍성냥공장’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후 1970년 말 화재로 폐업한 후 남면으로 이전해 ‘남성성냥’으로 개칭·설립했으나 어려움을 겪다 다시 논산으로 옮겼다.

■ 한국기독교 장로회 홍산교회 - 부여군자율방범연합대 홍산자율방범대 - 그네나무 - 군기고 터

1906년 된 교회로 현재의 건물은 1994년 신축했고 2006년11월6일 100주년 행사를 치렀다.
과거 연회장, 재판소, 금융조합, 보건지소 등으로 사용됐던 부여군자율방범연합대 홍산자율방범대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으며 과거 그네를 매달아 놀았다고 해 일명 그네나무로 불리고 있는 느티나무다
객사 옆에 있는 군기고터로 일제 때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직진해 가면 블록 끝에 큰 ‘한국기독교 장로회 홍산교회’가 있다. 1906년 좌홍리 김운순씨가 중심이 돼 미국선교사 부위렴 목사와 박성화 전도사의 전도로 시작됐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 신축했고 2006년11월6일 100주년 행사를 치렀다. 이를 볼 때 올해로 113년이 되는 셈이다.

이 교회를 감싸고 우측으로 돌면 왼쪽으로 ‘부여군자율방범연합대 홍산자율방범대’가 있다.
이 자리는 1908년12월 재판소법 발효에 의해 ‘홍산재판소’가 들어섰고 1909년9월11일 정수권 판사가 부임했다. 재판소는 2~3년간 운영되다가 강경으로 이전했다. 당시의 건물은 1871년 중건된 향청으로 군사훈련을 하던 ‘연융청’ 역할을 했고 때에 따라서는 연회를 했다. 이후 홍산 최초의 금융기관인 ‘금융조합 농협’이 1930년 들어섰고 이후 증·개축해 현재의 건물 형태를 갖췄다. 이후 1979년 ‘홍산보건지소’가 둥지를 틀면서 홍산민의 건강을 보듬었다. 이 보건지소는 현재 면사무소 옆에 있는 홍산보건지소가 생기기 전까지 운영됐다.

이 건물 오른쪽에 주차장 뒤에 ‘느티나무’가 있다. 표지석을 보면 1979년4월 보호수로 지정했다는데 수령이 150년으로 돼 있다. 그동안 많은 느티나무를 본 경험으로 볼 때, 이 정도 크기라면 150년은 훨씬 더 돼 보였다. 족히 200~300년은 될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그네나무’라고 부른다. 과거 단오가 되면 부녀자들은 허가된 외출이어서 이 나무에 줄을 매 그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네띄기 경주, 그네띄기 놀이 등을 즐겼다.

그네나무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잡초만 무성한 넓은 공터가 철책으로 둘러쳐 있다.
객사 서쪽에 있는 이 공터가 ‘군기고 터’다. 조선 시대 이몽학의 난 때 무기고로 활용됐다. 1922년 일본인에 의해 ‘홍산심상소학교’를 개교했고 이후 1945년 광복 후 홍산공립초등학교 분교로 활용되다 폐교됐다. 홍산심상소학교 당시 학교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신사’가 있었고 중앙과 오른쪽에는 교실과 강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억하기 싫은 역사를 간직한 곳 중 하나이다. 2013년 문화재발굴로 인해 군기고터로 명명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홍산 객사 - 은행나무

1982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97호로 지정받았고 한때 홍산면사무소로 활용됐던 객사다
2006년12월29일 향토유적 83호와 1979년4월1일 보호수로 지정된 높이 15m, 둘레 7.5m의 760여년된 객사 옆에 있는 ‘은행나무’다

군기고터 옆으로 ‘홍산객사’가 있다. 홍산 객사는 전국에 남아 있는 객사 중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편으로 1982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97호로 지정받았다.

1836년 병신년에 김용근 군수가 건축했고 전패를 봉안해 삭, 망월에 봉배를 드리며 대빈을 맞이해 문무시를 치르던 곳이다.
1909년 사립 한흥학교를 개교해 활용되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홍산공립보통학교로 운영됐다. 이후 1914년부터 1964년까지 홍산면사무소로 활용되다 1983년 크게 중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객사 서쪽 옆 창고가 있었는데 이를 헐고 홍산 최초의 보건지소가 1960년 초 설립돼 운영되다가 1979년 홍산자율방법대 건물로 이전했다. 당시 홍산에서 대양병원을 운영하던 임성일 원장이 소장으로 근무했다.

객사 옆에는 2006년12월29일 향토유적 83호와 1979년4월1일 보호수로 지정된 높이 15m, 둘레 7.5m의 760여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열매가 맺지 않는 수은행나무로 베이지 않고 버텨온 세월이 신비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을 지키는, 더 나가 홍산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큰 재난이나 경사스러운 일이 생길 때는 울기도 하고 불빛이 내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이 위급한 일이 생길 때 기원을 드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 마을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례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징용 또는 징병으로 끌려간 마을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이상 없이 무사귀환한 사실은 이 나무의 보호였다는 것.

이를 재확인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1946년 험한 태풍이 몰아쳐 큰 가지가 부러졌지만, 나무 밑에 사는 조씨 집과 차씨 집 사이로 떨어져 사람과 두 집이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 사실 이전부터 나무 밑에 살던 조씨와 차씨는 매년 정월에 무사태평을 빌며 나무에 치성을 올렸었다. 이후 조씨와 차씨가 이사하고 마을에서는 단 한 차례 제를 올린 게 다다.
또 나무 아래 우물이 있었는데 개천이 다 말라도 이곳의 물은 마르지 않아 마을에 귀한 물을 공급해 줬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서는 이 은행나무를 ‘은혜나무’로 부른다.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던 것
객사 동쪽 담은 60~70년대 실내극장이 있던 자리고 객사 남쪽으로 만덕교비를 비롯해 각종 비가 줄지어있다.

■ 유진경 북촌2리 이장
북촌2리는 홍산객사, 만덕교비,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분야별 지정된 것이 많다. 홍산 객사는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 되는 보존이 잘 된 객사로 가치가 높다. 또 은행나무는 마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다. 과거엔 제를 지냈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제를 지내 마을은 넘어 홍산 또는 그 이상을 지키는 나무로 인정받게 하고 싶다. 
마을은 교회, 인쇄소, 사금공장, 양복점 등 최초라는 타이틀이 많아 경제가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김의창 제12대 충청남도지사와 장석철 준장 등 걸출한 인물이 출생한 마을이다.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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