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복사꽃 축제로 이름난 대동단결의 ‘삼용1리(三龍1里)’
[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복사꽃 축제로 이름난 대동단결의 ‘삼용1리(三龍1里)’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5.22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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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15편 : 남면 삼용1리

■ 마을 유래 및 개요
남면 삼용1리는 국도4호선 정동교차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용로를 경계로 동쪽이 삼용2리, 서쪽이 삼용1리다. 서로는 교원천과 서천-공주간 고속도로가 있고 남으로는 금천이 흐르며, 북으로는 국도 4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마을 주택은 낮은 구릉지에 회관을 중심으로 밀집돼 있고 삼용로 경계로 서쪽 경지 정리한 농지(남면평야)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남면 삼용1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남면 삼용1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백제 때에 이미 인류가 정착해 농경지의 개척을 서둘렀던 지역으로 삼천(三川)과 용성(龍城)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냇물이 합치는 삼천과 흙을 틀어 올린 것 같은 용성은 고대 집단마을을 형성하는 데 좋은 입지 조건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해서 정착한 부여서씨, 고려초 상주황씨가 정착해 농경지를 일구어 살았다.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 삼천리와 용성리를 병합해 삼룡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했다. 법정리의 면적은 1.37㎢다.

마을은 두 마을이 합쳐진 것으로 하나는 세 갈래로 흐르고 있던 내천이 마을 앞에서 한데 모여 흐른다 해 삼천이라 부르던 마을과 또 하나는 산세가 뱀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 뱀리로 불러오다가 어느 노승이 마을을 지나가다 이 산의 형국은 뱀이 아니라 용의 형태로 해야 마을이 번성한다 해 용성, 용성리의 용자를 취해 삼용리로 불리게 됐다.

■ 서씨 정려 - 외딴 작은 숲

마을입구에 있는 서씨정려로 현재의 자리는 옮긴 것이다
마을입구에 있는 서씨정려로 현재의 자리는 옮긴 것이다

요 며칠 새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하며 막바지 힘찬 농성하고 하고 있는 중인 3월22일 삼용리를 찾았다.
국도 4호선 정동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삼용로라는 길이 시작되는데 왼쪽이 삼용2리, 오른쪽이 삼용1리다.

삼용리 입구엔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옆에 ‘삼용리 삼천 용성마을 삼성교회’라는 표지석이 있다. 다시 그 옆에 얼마 안 돼 보이는 선명한 채색의 단청을 한 정려가 보인다. 이것은 부여 ‘서씨 정려(徐氏 旌閭)’로 원래 정문거리라고 불리는 버스정류장에 있었던 것을 도로공사로 인해 이곳 동네 쪽 가까이 옮겨왔다. 그러다 보니 단청이 뚜렷한 것. 이 정려의 주인공은 서진우, 서영의 두 사람으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다. 먼저 서진우는 부여 사람이고 호는 수당(睡堂)이다. 효행으로 1886년(고종 23)에 승지에 추증되고 명정됐다. 그는 천성으로 부모 공경을 독실히 하고, 부모가 병이 나자 약 달이기를 수십년 하면서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약을 구해 드렸다고 전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초상 때 예와 정성을 다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한다. 서영의는 서진우의 손자로 호는 죽헌(竹軒)이고, 효행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됐고, 1886년(고종 23)에 명정됐다.
이 정려서 160여m 직진하면 길옆 오른쪽에 이 마을의 유일한 약 3,300m²규모의 ‘외딴 작은 숲’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서 본 마을에 도착 전 오른쪽에 상당히 넓은 면적의 경지 정리한 농지가 펼쳐져 있다.

■ 회관 - 삼천리 책 마을 내용 - 응원가 - 잊고 싶은 역사

삼용1리 마을회관으로 도로와 너무 인접해 다소 위험스러워 보인다
삼용1리 마을회관으로 도로와 너무 인접해 다소 위험스러워 보인다

계속 직진해 가다 보면 주택가가 나오고 조금 지나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에서 서형석 이장과 서승욱 옹(89) 등을 만나 대략적인 마을 이야기를 들어봤다. 놀라운 것은 마을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작성해 문서 및 사진 등을 정리한 ‘三川里책 마을 유래’라는 책을 발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임에도 서 이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의 마을애(愛)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책의 내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먼저 마을 풍속이다.
설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큰 잔치를 연다.
주민들은 청소와 새 옷을 입고 떡, 고기 등의 음식을 장만해 조상에게 제사하고 어른들은 자손들의 세배를 받는다.
마을 젊은이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한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세뱃돈과 음식을 내준다. 이후 각자 성묘를 마친 후에는 남녀가 따로 놀이를 하는데 남자는 연날리기, 제기차기, 팽이 돌리기, 집공차기 등을 하고 여자들은 널뛰기, 이짜이짜하기, 공기놀이 등을 한다.
정월보름이면 해 질 무렵 집 안 청소를 하고 자기 나이만큼 다리를 왕복한 후 저녁을 먹었다. 밤에는 옆 동네 홍산면 좌홍리 사람들하고 쥐불싸움했는데 일진일퇴의 장관을 이뤘다. 5월 단오에는 마을의 큰 정자나무에 그네를 매고 그네뛰기도 했고 7월7일 칠석행사를 크게 했다. 백중에는 반끼리 음식을 해 먹던 것을 현재는 마을 전체로 통합해 운영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행사를 치른다. 추석엔 성묘를 마친 후 젊은이들은 삼용2리 부여축협가축시장(前 우마장) 잔디에서 씨름시합을 하며 하루를 즐겼다.
또 결혼식이 있을 때면 신부는 가마 타고 시집간다.
신랑은 3일 후에 신부 댁에 인사차 오면 신부 동네 청년들은 신랑이 동네 처녀를 훔쳐갔다고 다리를 묶어 어깨에 메고 발바닥을 목침으로 친다. 신부 댁에서는 매 맞는 남편을 위해 봐 달라며 푸짐한 술상을 차려오면 끝이 나고 신랑은 노래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중상일을 피해 3일장 또는 5일장으로 상을 치르는데 시신을 상여로 운구해 장지까지 가는데 중간에 다리가 있으면 요령잡이는 유대 꾼들에게 상여를 멈추게 한다. 이후 유족들에게 망인을 향해 절을 시키고 망인의 저승길 노잣돈을 상여에 꼬아 걸도록 하는 풍속도 있었다.

일부를 빼고는 당시 웬만한 마을은 이와 비슷한 풍속이 있었다. 현재는 많이 사라져 어느 마을이던지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다만 일부 문화 및 공연 행사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하신 우리의 문화가 됐다. 우리 것인데 보기가 힘들다니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마을 위주의 행사를 하다 보니 단결심과 화합심도 자연히 도드라지게 마련이다. 이를 한 차원 높여 굳힌 것이 흔하지 않은 ‘응원가’다.
가사 보면 “장하고도 미쁘다 우리 삼용청년선수 / 빛나는 두 눈과 강철 같은 팔다리에 / 열사람이 뭉쳐서 한 맘으로 하나 되니 // 하늘을 찌르고 산이라도 부수리로다 / 적수비록 강할지나 염려할 것 무엇이냐 / 내 힘껏 싸우고 법대로 겨루어 승리의 // 면류관 받아서 쓰라 면류관 / 만세 만세 우리 삼용청년만세 만세 만세 / 우리 삼용청년만세 만만세  와 ∼”라고 돼 있다.

이랬던 마을이지만, 잊고 싶은 아픈 역사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유린으로 마을은 피폐해지고 해방을 맞았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마을도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됐다. 마을 주민이던 권학수와 서승진을 경찰에서 체포해갔는데 그 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젊은 청년층은 공산주의를 부르짖으며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런 과정에서 애국자로 지명된 자는 구타당하고 마을 이장과 교회장로인 정재호는 행방불명돼 현재까지도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전쟁 하반기에 민주주의가 굳혀져 갈 무렵 대부분 가난한 사람으로 이뤄진 공산당원들은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전쟁의 향방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며 복수의 대가로 살육과 폭력이 자행됐던 그때의 역사는 몇몇 사람만이 알뿐 희미해져 간다. 차라리 지우고 싶은 역사인지 모른다.

회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관을 나왔다. 회관 앞이 바로 차로가 있어 사람이 드나드는 데 좀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성교회 - 경로정 - 함연호 공적비 - 청룡 - 느티나무 보호수 - 주엽나무 - 거북바위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성교회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성교회다
​마을주민이 십시일반 모아 지은 순수한 마을의 건물이다 ​
​마을주민이 십시일반 모아 지은 순수한 마을의 건물이다 ​
보호수 인근에서 복사꽃축제을 알리는 풍물패들이
보호수 인근에서 복사꽃축제을 알리는 풍물패들이 흥겨운 가락을 울리고 있다
세그루의 나무 중 가운데 크고 힘차게 뻗은 나무가 주엽나무다
세그루의 나무 중 가운데 크고 힘차게 뻗은 나무가 주엽나무다

회관에서 볼 때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갔다. 쭉 따라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교회가 보인다. 꽤 큰 이 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성교회’다.
계속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약간 경사면에 ‘경로정’이라는 2층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마을의 화합을 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순수하게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또 이 건물 자리에는 과거 800여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건물 오른쪽에 공적비가 서 있다. 주인공은 이 마을 이장을 보았던 ‘함연호’다. 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10동안 이장을 보면서 진입로 포장 등 주민복지생활에 열과 성을 보였고 경로효친사상이 투철해 다목적 경로당 건립 등에 앞장서 준공하게 된 것에 대한 공적비다.
여기서 약 6m정도 내려가면 ‘청룡’이라는 곳에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이 400여년이 넘은 나무로 1979년4월1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이 나무뿐만 아니라 매우 큰 ‘주엽나무’도 있다. 이렇게 큰 주엽나무는 아주 보기 드물어 관련 학계 사람들은 종종 찾아오곤 한다. 서 이장은 보호수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커다란 나무는 그 전에도 10여 그루가 이 근처에 있었다. 마을 앞 냇둑에는 느릅나무 고목 3~4주가 아름드리였고 삽다리(현 삼천교) 가는 둑에도 느릅나무 고목 5~6주 있었다. 오래된 큰 고목들이 있다 보니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에 의해 밤이면 거목 주의에서 도깨비불이 돼 날아다녔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무서워하기만 했다.
이 고목들은 평야지대에서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의 역할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 삼성교회에서 청룡까지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도 방풍림 역할을 했다. 이 나무들은 하천개수와 농지정리로 모두 사라졌다.
느티나무와 주엽나무 사이에 ‘거북바위’가 있다. 1996년에 세웠다는 표지석 위에 있는 이 거북바위는 굴삭기 기사인 박병학이라는 사람이 기증한 것이다. 이 청룡에는 쇠를 녹여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만들던 ‘대장간’도 있었다. 또 청룡 동쪽으로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 복사꽃 축제장인 농산물간이집하장 - 동편우물터 – 서편우물터 – 유기장 - 새뜸(새뜸우물터) - 전기

복사꽃 사이로 농산물간이집하장에서 북사꽃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청룡에서 서쪽 길로 가다보면 왼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곳에 큰 ‘농산물간이집하장’이 있다. 이곳이 복사꽃 축제를 여는 장소다. 풍물, 춤과 음악 등이 복사꽃 개화 시기에 맞춰 축제를 여는데 마을의 화합도 이끌고 있다.
계속 직진해 조금만 가면 왼쪽에 전봇대가 서 있고 바로 오른쪽에 아스콘으로 포장된 작은 곳이 있다. 이곳이 ‘동편우물터’다.
이곳에서 남쪽 경지정리한 곳을 바라보니 햇미나리를 채취하는 농군들의 모습에서 봄이 왔음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직진해 170여m를 가면 작은 느티나무 아래 보도블록이 깔려있고 의자와 탁자가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은 ‘서편우물’이 있던 터다.

여기서 우측으로 난 길을 바로 올라가면 서쪽에 푸른색 지붕의 집이 보인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마을의 서쪽 경지 정리한 지역에 소나무가 줄지어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했다. 이것이 1970년도까지 유효했다. 삼용1리는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모두 평야지인 터라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선조들은 바람을 막고자 나무를 심는 지혜가 후에 수백 년이 돼 그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그 흔적은 지나온 청룡에서 아스라이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직진해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집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에 ‘유기장’이 있던 자리다. 유기장은 놋그릇을 만드는 곳으로 이 부근에 잔류물인 쇠똥 등이 아주 산재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우측 길로 들어가면 삼거리 갈라지는 길이 있다. 이 삼거리에 ‘새뜸우물터’가 있는 데 이곳도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다. 서 이장은 우물을 복원하고 싶은 마음이 운예지망(雲霓之望)이다.
경지정리로 나무가 사라진 것, 개발에 떠밀려 우물이 사라진 것 등은 이제 ‘문명의 역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우물터 주변을 ‘새뜸’이라 부른다. 새뜸은 100mm만 비가 와도 침수가 되는 저지대 주택 10여채가 이주해 형성한 마을이다.
새뜸을 범위를 넓히면 ‘서편’인데 이곳에서 물레방앗간을 경영하다가 현재 재빼기 김영태씨 집 옆으로 이전하면서 처음 전기를 유치해 전기 방앗간을 운영했다. 이에 따라 각 가정에 전기설치를 정부에 건의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전깃불이 들어왔다.

■ 방앗간 – 농업인건강관리실(커피숍 구상) – 삼천교 – 삼천보

마을 어르신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농업인건강관리실로 향후 2층에 커피숍이 들어설 예정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농업인건강관리실로 향후 2층에 커피숍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마을과 남면 내곡리를 연결해 주는 삼천교다
이 마을과 남면 내곡리를 연결해 주는 삼천교다
삼천이라는 마을의 유래지을 만들어준 삼천보이다
삼천이라는 마을의 유래지이고 이 하천에 있는 삼천보이다

우물터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올라가다 보면 처음 서씨정려에서 들어와 회관으로 가는 길과 합류한다. 합류 지점에서 회관으로 가늘 길 왼쪽에 방앗간이 있던 자리다.
회관으로 온 후 맞은편에 ‘농업인건강관리실’이 있다. 이 건물은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운동기구와 찜질방, 그리고 목욕시설 등이 있어 말 그대로 어르신의 건강관리를 하는 곳이다. 서 이장은 마을만들기 사업을 통해 이 건물 옥상에 마을 주민, 특히 부녀회원을 위한 커피숍을 차린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유는 2층에서 서쪽을 보면 석양으로 인해 평야지와 산이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감마저 든다는 데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 이장의 포부를 들은 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후 회관에서 삼성교회를 거쳐 금천방향으로 가면 남면 내곡리와 연결해 주는 ‘삼천교’가 나온다. 길이 125m, 폭9m로 2002년12월8일에 준공했다. 이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금천의 둑길을 따라가면 ‘삼천보’가 나타난다. 원천은 옥산, 홍산시내 삽티에서 흘러와 삼용리 앞에서 합류돼 삼천(三川)이라는 마을지명을 만들었고 이 보가 있는 자리가 유래지(由來支)인 것. 보에 다다랐을 때는 저녁놀이 거뭇거뭇 짙어가고 있어 흑백잔치의 향연이 주위를 수놓았다.


■ 서형석 삼용1리 이장
먼저 마을의 자랑이라고 보면 ‘대동단결’이다.
옛날부터 단결력이 좋고 운동 기량도 우수해 면내 체육대회 때에는 상위권입상을 주도했다. 이런 이유로 마을 소유의 공동체 부동산이 어느 마을보다 많다. 회관, 다목적 경로당, 농산물 간이집하장 및 관련 토지, 농업인건강관리실 등 마을 주민들의 희생정신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또 함석호 전 부여경찰서장, 이상철 전 부여구의회 부의장, 서환식 동장, 서울대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송기창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오영환 서부여농협조합장, 이종연 전 남면 조합장 등 대내외적으로 마을을 빛내고 있는 인물들이다.
아울러 현재 우리 마을에서는 복사꽃축제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개최했다. 앞으로 복사꽃축제는 마을의 상징으로 계승.발전시키겠다.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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