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천 멋] 아주 강한 땅의 기를 받은 홍산향교와 청일사
[알천 멋] 아주 강한 땅의 기를 받은 홍산향교와 청일사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6.06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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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향교, 역적이 나와 위에 있던 향교를 아래인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청일사, 김시습과 김효종 배향…우암 송시열 선생 ‘청일사기’ 기록
홍산향교·청일사,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으려 산을 절단해 고개를 만들었다
김시습 전설, 향교토지 토지개혁 대상 배제, 향교 소 잡을 특혜 부여

■ 홍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28호인 홍산향교다
홍산향교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보호수이자 향토유적인 은행나무다
홍산향교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보호수이자 향토유적인 은행나무다
홍산향교 왼쪽에 있는 아주 큰 느티나무 2그루다
홍산향교 왼쪽에 있는 아주 큰 느티나무 2그루다

향교골에는 제일 위에는 홍산향교가 있다.
이 향교는 1997년12월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됐다. 창건 연대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홍산은 본래 백제 때 대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한산으로 고쳐서 가림군(임천)의 영현이 됐다. 고려 초에는 홍산으로 고쳐 가림의 속현(屬縣)이 됐다. 1175년에 한산 감무가 겸하게 했고, 1413년에 현감으로 바꾸었다. 이를 볼 때 일읍일교의 원칙에 따라 홍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홍산현 학교조에 “향교가 현의 북쪽 3리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1591년 관찰사 이성중에 의해서 중수됐다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됐다. 다시 1610년 이덕기에 의해 중건됐다.

1643년 부여지방의 유림 홍처윤이 ‘향교의 위치가 너무 높아 불편하다’ 해 그 아래 평평한 곳(지금의 위치)으로 이전했다.
일설(김옹 말씀)에 따르면 기존 자리에 향교가 있을 때는 역적(이몽학)이 나왔다. 그래서 향교 자리 지세가 너무 강해 잘 못 지어졌다고 해 5m정도 아래인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지금까지 위치를 고수하게 됐다. 실제 향교 위는 평평한 지대가 형성돼 있다. 주장은 다르지만 아래로 이전한 것은 맥을 같이 해 사실인 듯싶고 아주 흥미롭다.

이후 여러 차례 각 부분을 중수해 현재 홍산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삼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향 인물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9명과 이율곡 등 국내성현 18명 등 27위의 위패를 배양하고 있고 문묘에 향사하는 기능만 남아 매년 음력 2, 8월의 상정일에는 석전제를 올리고 있다.

향교에 전해 내려오던 고전적은 6·25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지만, 만력 연간의 ‘제향교’를 비롯한 15종의 현판은 홍산향교의 역사와 전통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또 향교 오른쪽에는 550년 정도 된 보호수이자 향토유적인 은행나무가 있다. 보호수 고유번호 155 지정은 1979년4월1일에 됐고 향토유적 제84호 지정은 2006년12월29일에 됐다. 왼쪽에는 가파른 경사면에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 데 상당히 큰 것으로 보아 수령이 오래돼 보였다. 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는 표지석은 보이지 않아 향후 검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옛날에 나라에서 향교에 특혜를 준 것 같다.
나라에서 소를 함부로 못 잡게 했는데 향교에는 소를 잡을 권리를 줬다. 소를 잡아서 생긴 이익금으로 향교운영 등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권리를 가진 곳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전국에 2곳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청일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인 청일사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인 청일사이다

서원골 제일 위에 청일사라는 서원이 있다.
청일사는 1984년5월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처음에는 1621년 당시 홍산현감 심완직이 무량사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진상을 모시고 제향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현감 권완이 1658년 지금의 향교 부근에 이건했으며 1704년에 사액했고 1866년에 철폐됐다가 1970년에 복구했다. 배향인물은 김시습으로 강릉인이고 호는 매월당 또는 동봉으로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또한 해동이 백이라 칭하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김효종으로 광산인이고 호는 오옹이다. 단종의 선위를 보고 내산에 은거하면서 매월당과 사귀었다. 당초에는 매월당 한 사람을 모셨는데 뒤에 사론에 따라 추가 배향했다. 1976년에 김시습 영정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됐다. 제사는 춘추로 행했다.
인조~숙종 때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노론의 영수이고 송자대전 215권의 저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청일사기’가 전해진다.
청일사 양쪽에 은행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잘린 상태로 그루터기를 보니 꽤 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왜 벴는지 알 수 없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 황만식 이장, 김일현옹, 김삼현씨 대담 정리
김일현옹은 김시습과 관련 전설을 이야기해줬다.
외산 무량사에서 이곳으로 오다 보면 삽티를 거치게 되는데 김시습이 마침 삽티를 지나게 됐다. 삽티 시냇가에서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먹고 있었다. 김시습이 돌아가다가 다시 와 “나도 술과 고기를 좀 달라”고 했다. 주민들은 “중이 무슨 술과 고기를 먹느냐”고 했다. 김시습은 “중도 사람이다. 술과 고기를 달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물고기 한 접을 먹고 술 한 잔 들이켰다. 좌중 중이 술 먹고 고기 먹는다고 난리가 났다. 김시습은 “여보쇼! 당신들이 줘서 먹었어. 그렇게 더럽고 아까우면 내놓겠다”고 한 후 저만치 서서 “캭~ 캭~”하고 내뱉었다. 그런데 꼬리가 없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꼬리는 왜 떼어먹었냐?”라고 하자. 김시습은 “여보쇼! 냄비 좀 보라니까”라고 했다. 냄비에 물고기 꼬리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 홍산향교와 청일사가 일제강점기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민족의 정기를 끊는다며 산을 잘라 고개를 만든 것. 우리에게 잘 알려진 쇠말뚝(혈침)을 전국의 중요 혈이 흐르는 산에 박아 민족의 정기를 끊은 것과 같은 이치다.
일제에서 보면 향교와 서원의 지기가 워낙 강해 폭동, 반란 등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고 판단, 북쪽에는 장고개, 남쪽에는 비누고개를 만들어 고립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현재도 장고개는 비누고개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향교와 서원에서 종사하거나 인근 주민들은 해방 전에는 군대와 세금 면제을 받았다. 향교와 서원 일을 한다는 이유여서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이런 특혜도 없어졌다. 또 해방 전후 향교나 서원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반말로 이름을 부르고 노비처럼 부려먹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해방 후 토지개혁이 단행됐다.
박만기 홍산면장은 불법임에도 면장 직권으로 향교와 서원이 소유한 토지를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원칙대로 하자면 향교 토지에서 농사짓던 사람이 토지개혁으로 토지소유자가 돼야 맞다. 하지만 당시 박 면장은 자기 권한을 이용해 향교나 서원 토지를 못 건드리게 했다. 이유는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적 사상이 후대에 계승·발전하는 데에 있어서 향교나 서원이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향교 중 몇 번째 안가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향교의 토지는 특성상·절차상 매매가 상당히 어려워 당시 토지를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다. 토지가 유지되는 만큼 숭고한 유교 사상은 변함없이 후대에 이어질 것임에 의심의 틈이 없다.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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