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조선시대 홍산현 교통의 중심지인 '교원1리'
[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조선시대 홍산현 교통의 중심지인 '교원1리'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7.1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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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16편 : 홍산면 교원1리

■ 마을 개요 및 유래 
홍산면 교원1리는 국도 4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경계를 이루고 비교적 거리가 비슷하게 유지한 5각형의 안정적인 구조를 갖춘 마을이다. 또 마을은 이 산과 골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고 앞은 평야 지대로 탁 트여 답답함을 해소해준다.

교원1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교원1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정되나 태봉산 서쪽에서 출토되는 유물(돌검)로 보아 백제 이전에 인류가 정착했을 것으로 추산할 수도 있다. 교원리의 마을형성은 고려 초기로 추측을 한다. 홍산향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밀양박씨가 서원곡에 이주 건촌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역촌, 서원골, 교촌, 북촌 일부를 병합해 교촌과 서원의 이름을 따서 교원리라 칭했다. 조선시대 숙홍역이라는 역촌 마을이 교원1리로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정리의 면적은 1.52㎢로 현재 교원1리의 인구 74명이다.

■ 출발 – 표지석 – 마을회관 – 위인열사초상

국도 4호선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마을 어귀에 훤칠하게 서 있는 표지석이다
널따란 마당을 가진 마을 회관이다
경찰 출신이 만든 민간단체가 모금운동의 일환으로 활용한 위인열사초상이다

무더위가 연속이던 7월1일, 교원1리를 찾아 나섰다. 이날은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삐쭉 내밀 듯, 말 듯 하고 산야는 옅은 연무로 부연해 다소 답답함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날씨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고 시원함을 줘 바깥 활동을 하기는 족하다.
날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부여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가면 교원천 부근, 즉 좌홍교에서 우측으로 나가면 사거리에 ‘역말부락, 어서오십시요, 교원1구’라고 쓰여 있는 날씬한 몸매의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서부여농협 양곡창고가 있다. 이 양곡창고 오른쪽에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다. 이곳 주변이 판판한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 북쪽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에서 이병구 이장, 김영학 대동계장, 김봉환 전 대동계장, 김삼현씨가 자리를 함께 해 마을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하던 중, 이 이장은 특별한 것이 있다며 수납장을 한참 뒤지더니 그림 몇 장을 들고 나왔다.
그림은 총 4장으로 첫 번째 그림은 상단에 ‘나라를 위한, 인류를 위한 동서고금’라는 글씨가 있고 정 중앙엔 한자로 ‘위인열사초상’이라고 세로로 쓰여 있다. 이글 왼쪽에 ‘인계내용’이라는 제목을 상단에 배치하고 한자로 ‘단군, 을지문덕, 세종대왕, 이순신’순으로 내려썼다. 이를 볼 때, 당시에는 단군 다음으로 을지문덕을 위인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데 현재의 시각으로는 참 흥미로운 자료다.
‘위인열사초상’글 오른쪽으로 ‘교실에 공부방에 비치하여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자’라고 세로로 쓰여 있고 그 오른쪽에 손글씨 한문으로 ‘단기 4292년7월3일 정가 1,500환, 즉 1959년7월3일 정가 1,500환’이라고 세로로 쓰여 있다.
‘위인열사초상’ 글 아래 상단에 ‘총발매원’, 두 번째 줄에 ‘서울특별시 중구남창구동 282’, 셋째 줄에 ‘대한상이경찰관자립회직할사업부’라고 한문으로 쓰여있다.
또 앞서 설명한 맨 앞장과 더불어 단군, 을지문덕, 세종대왕, 이순신의 초상을 덧붙이고 이 위인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림은 단군을 제외하고는 지금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모든 마을에 이 그림이 있었다고 하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이 사라져 귀하신 몸이 됐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당시 경찰 출신이 만든 민간단체가 모금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나래들 – 파평윤씨 재실 – 십자봉 – 쇠죽골 – 중뜸 - 깐재(꽌재)

나래로 만들어진 들이라 해 붙여진 나래들이다
바위가 서 있어서 붙여진 선바위가 숲사이로 가냘프게 보인다
아직도 식수로 쓰고 있는 마을의 중심(중뜸)에 있는 중뜸샘이다

마을회관에서 나와 좌측으로 돌아 북쪽으로 가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직진했다.
계속 직진하면 길을 중심으로 왼쪽은 마을과 숲이 있고 오른쪽은 경지정리한 평야지로 짙은 초록빛의 벼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 벼가 자라는 들이 ‘나래들’이고 이 들과 홍산면 정동리의 경계선을 교원천이 흐르고 있다. 나래들의 나래는 논밭을 반반하고 평평하게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를 말하는 것으로 이 나래로 만들어진 들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다.
더 직진하면 이 길의 마지막 집이 있는 데 이곳에서부터 ‘선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란 바위가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조금 더 가면 산모퉁이 부근에 나무 사이로 바위가 보인다.
여기서 뒤돌아 왔던 길로 가다 보면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가다 다시 우측 논틀밭틀로 올라가면 ‘파평윤씨 재실’이 있다.
이 재실 오른쪽으로 산길이 있는 데 쭉 올라가면 ‘십자봉’이 나온다. 십자봉은 봉우리가 십자로 갈라지는 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재실은 산과 산 사이로 움푹 들어간 제일 높은 위치로 재실 앞은 논밭이 계단 형태로 골이 형성돼 있다. 이 골이 ‘쇠죽골’로 쇠죽은 소의 먹이를 말하는 것으로 말의 먹이도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은 우마에 먹이를 준 곳이라 추측한다.
재실을 지나 쇠죽골을 따라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샘터가 있다. 이 샘터가 ‘중뜸샘’으로 현재 마을의 식수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샘을 중심으로 ‘중뜸’이라 부른다. 역사에는 관가와 연결고리가 돼 교통과 연락 등 업무를 담당하는 중심인물인 역장이 있고 이 역장은 사는 곳은 자연적으로 마을의 중심이 됐다. 중뜸은 즉 역장이 살던 여럿 뜸 중 중심 뜸이었던 것. 샘 앞으로 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아주 낮은 고개가 있는 데 ‘깐재(꽌재)’라 부른다. 십자봉에서 사습터산으로 가는 가장 낮은 지대의 이 고개는 원래 관재(毌:꿰뚫을 관, 岾:고개 재)라고 불렀다. 풀이하면 마을 중앙을 뚫어 말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오랜 세월 음운변화로 거치면서 깐재(꽌재)로 불리는 것.

■ 영의정 홍윤성 – 숙홍역지 – 봉죽골

꽌재 북쪽에 있는 언덕으로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고향을 찾아 잠깐 쉬던 곳이다. 언덕 왼쪽은 숙홍역지로 추정되는 장소다
꽌재 북쪽에 있는 언덕으로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고향을 찾아 잠깐 쉬던 곳이다. 언덕 왼쪽은 숙홍역지로 추정되는 장소다

이 재와 아주 가까이 북쪽으로 산모퉁이가 있다. 이곳에는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산길이 있었고 길옆으로 큰 느티나무 3그루가 있었다. 조선 세조 때 영의정 홍윤성(알천 멋에서 홍산면과 관련 연재 중)은 이 나무 밑에서 가끔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말한 재실 옆 산길 입구에서 십자봉을 거쳐 산등성이를 따라 산모퉁이와 연결된 길이 말의 이동 경로로 추측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이곳 근처에 역촌이 형성됐다. 산모퉁이 왼쪽에 위치한 교원리 89-1번지 일대가 그곳으로 ‘숙홍역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고개를 넘어 들어간다고 해 '안뜸(넘어뜸)'이라고도 부른다. 이인도(공주의 이인역을 중심으로 편성한 역도)에 속한 역으로 원을 겸해 쉬여가기도 해 숙홍역이라 불렀다. 본래 이름은 비능(非能)으로 태종원년에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 해 개칭한 것.
당시 숙홍역은 소로역으로 역에는 대마 1필, 역마 2필, 복마 3필, 역리 31명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역에서는 관리의 왕래, 숙박, 진상상품 등의 관물수송, 정보 수집 보고 등의 기능을 했다. 역촌은 역마을로 1940년경 조선 전역에 리 단위에서 마을 단위로 나눴다. 일제강점기 정책하에서 국민정신총동원을 설치할 때 교원리에서 분리해 국민정신총동원 역촌부락연맹이라 칭호를 붙여 역촌마을에 이장을 두고 교원리가 교촌(향교마을), 청동(서원마을), 역촌(역말마을)으로 분리해 3개 마을 중 역말마을을 역촌이라 부르고 있다.
조금 직진하면 길옆에 ‘교원1리마을공동기계보관창고’가 있다. 이 창고 주위부터 북쪽으로 산 사이 골에 집과 밭 등으로 이뤄진 ‘봉죽골’이 있다. 봉죽은 봉황이 깃드는 대나무란 뜻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대나무 끝에 꿩 깃을 매단 것을 말한다. 현재 이 뜸에는 대나무도 있고 과거 풍년을 기원해 곳곳에 봉죽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봉죽골을 지나다 보니 노란색, 붉은색의 소화전이 길 가장자리에 눈에 띈다. 웬 한적한 시골에 소화전일까. 지금까지 ‘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처음 본다. 화재를 대비하기 위한 시설물이니 이 마을은 복 많이 받은 것 같다.

■ 모이마당 – 소망농장 - 비누고개(골) – 뒷골 – 꽃동산 - 샘골

어설픈 사거리에 있는 소를 사육하는 소망농장이다

봉죽골에서 남쪽으로 직진하면 모퉁이 언덕에 소나무 등 조경수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 언덕이 옛날에 모이마당(묘마당)이었다. 큰 묘가 3~4기 있었고 묘 주위에서 많은 어린이가 놀다 보니 자연적으로 마당이 생긴 경우다.
이 모퉁이를 휘감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측으로 경지정리한 다랭이논을 마치 다리를 건너듯 가로질러 간다.
이 길 끝에 어설픈 사거리가 있고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규모가 큰 ‘소망농장’이라는 우사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큰길과 만난다. 여기서 좌측으로 큰길이 고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교원2리와 경계를 이루는 ‘비누고개’다. 비누란 ‘비늘’이 오랜 세월 거치는 동안 음운변화로 만들어진 말로써 물고기나 뱀의 껍질, 또는 이와 비슷한 물건을 통틀어 말한다. 이 고개에서 팔기도 했다는 반짝이는 돌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한참 공사 중인 이 고개에서 되돌아 왔던 길로 가다 다시 좁은 길로 들어가면 오른쪽은 산이 있고 왼쪽은 경지정리한 다랭이논이 있다. 이 남북으로 기다랗게 형성된 다랭이논이 있는 곳을 ‘비누고개골’이라 부른다. 앞서 고개의 이름 따 붙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길을 따라 직진해 내려가면 원점인 어설픈 사거리와 우사가 있는 곳이 나온다. 우사 주변이 ‘큰 뒷골’이고 우사 뒤편 밭으로 이뤄진 곳이 ‘작은 뒷골’이다. 이 뒷골이라는 말은 마을의 제일 후미에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 뒷골 양쪽의 산이 ‘꽃동산’이다.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진달래가 많이 피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꽃동산이 뻗어있고, 왼쪽이 비누고개골과 아래로 이어진 넓고 길게 경지정리한 다랭이논이 있다. 이 다랭이논들이 있는 곳을 ‘샘골’이라 부른다. 샘골은 수렁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물이 많이 나오고 푹푹 빠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2000년에 경지정리를 마무리했고 그 이전에 농사를 지으려면 사람 허리만큼 빠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물이 나오는 만큼 가뭄 걱정은 없고 이곳에서 밥을 지으면 맛이 아주 좋았다.

■ 심뱅이 – 도정공장 - 사습터(새집터) – 갓고개 – 꽃동산 - 샘골

도정공장이다. 이 공장 왼쪽 언덕에 사습터가 있다
도정공장이다. 이 공장 왼쪽 언덕에 사습터가 있다
갓을 팔았던 갓점이 있다고 해 붙여진 갓고개다. 고개마루 왼쪽 양계장 입구가 있고 양계장터는 과거 인명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갓을 팔았던 갓점이 있다고 해 붙여진 갓고개다. 고개마루 왼쪽 양계장 입구가 있고 양계장터는 과거 인명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이 길을 계속 따라 내려가면 국도4호선과 만난다. 이 만나는 지점 부근이 ‘심뱅이’이다. 이 심뱅이는 ‘심(椹)+뱅이’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뱅이’는 간난뱅이, 게으름뱅이, 안달뱅이, 앉은뱅이, 주정뱅이, 좁쌀뱅이 등처럼 그것을 특성으로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고 뜻풀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椹’자는 오디(뽕나무 열매)를 뜻하고 있어 특이한 경우다. 옛날에 이곳에 뽕나무가 많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심뱅이에는 7채의 가옥이 있는데 교원1리에 1채 있고 나머지는 교원2리에 모두 있다.
여기서 돌아서 왔던 길로 가면 삼거리가 있고 우측으로 다랭이논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중간쯤에 관정 시설을 관리하기 위한 작은 건물이 있다. 이 식수원은 지대가 높아 물이 귀하게 여겨지던 마을에 소중한 젖줄이 돼 현재는 물 걱정이 없다.
계속 직진하면 ‘도정공장’이 있다. 이 공장 앞으로 난 길을 조금 따라가면 삼거리가 있고 이곳 주변에 가옥 몇 채가 있는데 ‘사습터(私習地)’라고 부른다. 사습터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을 뜻한다. 사습터가 있다 보니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 짓는 집이 늘어나 ‘새집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사습터에서 깐재(꽌재)까지를 ‘사습터산’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쇠죽골-윤씨재실 옆길-십자봉-능선-역촌-깐재(꽌재)-사습터산-사습터에 이르기까지 말과 관련된 이동로로 볼 수 있어 이 마을이 조선시대에 교통요지임을 확연히 대변한다. 이 지명이 없었다면 마을의 특징을 찾기 어려웠음은 자명하다.
이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갯마루가 나온다.
이 고갯마루가 ‘갓고개’다. 이 고개에 갓을 팔던 가게가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지금의 옥산면 상기리에는 갓을 생산하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갓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상기리 갓을 이 고개 갓점에서 많이 판매했다.
또 이 왼쪽에 양계장 입구가 있고 쭉 올라가면 산 정상부에 아주 큰 양계장이 있고 많은 조경수가 심어져 있다. 이곳이 과거 ‘인명중학교’가 있었다. 이 중학교는 1951년 남촌리에 일제 강점기 세워진 건물 2층에서 어려운 환경속에서 배움의 기회조차 없는 학생 40여명을 모아 농민학관을 세워 2세 교육을 실시했고 아래층에는 6·25전쟁으로 불구의 몸이 된 상이군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사진기술을 교육했다. 날이 갈수록 학생 수가 많아져 2년이 지난 1953년도에 당시 초대 도의원인 김재련씨가 현재 양계장 자리에 재단법인 새한학원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워 인명중학교라 명해 개교했다. 다시 입구로 와 고개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다시 좌측으로 가면 최초 원점인 회관에 도달한다.

■ 이병구 교원1리 이장
옛날에 홍산에서 부자 마을로 손꼽았던 마을이다. 또 한때 13명의 교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봉 명지대학교 법학대학장을 비롯한 김시환·윤여중·윤인중·이병호·정붕기 등 교장을 포함한 교육자, 윤완중 재경홍산면민회장(한국 바르코(주) 대표)등 기업인 등이 많다. 현재 주로 논농사를 짓지만, 인삼·밤·정원수 등도 마을의 경제를 이끌고 있다. 앞에는 구룡평야를 둔 마을은 전망이 좋아 현재 귀촌·귀농하는 사람이 이어지고 있다.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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