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민족의 정기를 지켜온 홍산향교와 청일사가 있는 ‘교원2리’
[발길 따라, 마을 이야기] 민족의 정기를 지켜온 홍산향교와 청일사가 있는 ‘교원2리’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7.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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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17편 홍산면 교원2리

■ 마을 유래 및 개요
교원2리는 홍산면 소재지에서 시작되는 지방도 613호선을 중심으로 양쪽에 펼쳐져 있어 남북으로 길면서 약간 통통하게 형성된 모양이다. 또 지방도를 따라 서쪽으로는 주로 산림지대고 동쪽으로는 뜸과 논이 형성돼 있고 더 동쪽으로는 산림지대다.

교원2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교원2리 전경(항공사진 뜨래마루 제공)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산되나 태봉산 서쪽에서 출토되는 유물(돌검)로 보아 백제 이전에 인류가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산할 수도 있다. 교원리의 마을형성은 고려 초기로 추측을 한다. 홍산향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밀양박씨가 서원곡에 이주 건촌한 것으로 전해진다.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역촌, 서원골, 교촌, 북촌 일부를 병합해 교촌과 서원의 이름을 따서 교원리라 칭했고 향교골, 서원골, 쭝재를 합해 교원2리로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정리의 면적은 1.52㎢이다.

참고로 교원2리의 홍산향교와 청일사 등과 관련은 별도 ‘알찬 멋’에서 다루기로 한다.

■ 홍산초등학교 이정표 표지석 - 전충청남도지사 한양수 청덕선정비 – 한 전 지사 이야기 – 쭝재

홍산초등학교 외곽 모서리에 홍산초등학교 입구 표지석과 전충청남도지사 한양수 청덕선정비가 있다

교원2리 찾은 5월28일은 모심기로 눈코 뜰 새 없는 농촌의 현실에 그대로 보여줬다.
트랙터는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논바닥을 휘젓고 다녀 모심기 좋게 두들겨 판판하게 한다. 또 어느 곳은 모를 심은 지 오래였는지 초록빛을 강하게 뿜고, 어느 곳은 무슨 이유인지 아직 모 심을 준비도 안 돼 보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삼현씨의 도움으로 마을 사정에 밝은 김일현옹(이하 김옹. 86)을 만났다.
이 어르신을 만나기 전 홍산초등학교(이하 홍산초) 운동장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이 운동장은 대각선으로 해 학교 건물 쪽은 북촌3리, 정문 쪽은 교원2리로 분할돼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 운동장 외곽 모서리 부분과 홍산로 2차선 도로 사이에 2009년에 세운 ‘홍산초 이정표 표지석’이 있고 그 옆에 ‘전충청남도지사 한양수 청덕선정비’라고 한자로 쓰여 있는 비가 있다. 이 비에는 한 前 지사의 탄생과 이력, 그리고 공적을 담고 있다. 김옹은 나이는 한 살 위이고 학교는 1년 후배인 한 前 지사와의 옛 추억을 들려줬다.
한 前 지사는 머리가 워낙 좋아 능력이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난 때문에 학교 소사로 일하면서 초등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학식이 풍부했다. 그러던 중 6·25사변이 터져 김옹은 보초를 서고 있는데 한 전 지사는 고령의 부친을 대신해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책을 가져왔는데 모두 영어책만 가져왔다. 당시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도 안 들어간 상태였다. 이후 주경야독을 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충남대학교를 졸업했다. 한 전 지사의 어느 부자인 친구가 충남대학교 앞에서 약방을 하고 있었는데 한 전 지사는 돈이 없다 보니 이 약방에 매일 와서 같이 먹고 자고 하니 친구가 귀찮아했다. 이에 김옹은 “우리 동네 사람인데 사람은 참 착하고 머리는 좋은 데 돈이 없어”라고 에둘러 이해시켰다. 유학을 가야만 성공의 문턱을 두드릴 때였던 당시, 결국 논 4마직이를 팔아 유학을 갔다 왔고 몇 년 후 충남도지사가 됐다. 이를 볼 때 어찌 보면 가난이 한 전 지사의 성공신화를 만든 아주 쓴 약이었다고 여겨진다.
홍산초 정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작은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가면 시설하우스가 많고 집이 서너 채 있다. 이곳에서 북촌3리 연봉마을로 가는 태봉산 바로 밑에 있는 고개를 ‘쭝재’라 부른다. 쭝재의 쭝은 ‘쭝긋이’처럼 입술과 귀 따위가 뻣뻣하게 세우거나 쀼죽이 내미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산맥의 마지막 산인 태봉산 끝자락 쭉 내민 곳에 위치한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 고개에서 뒤돌아 삼거리 원점으로 와 북쪽을 계속 가면 지방도 613호(이하 지방도)와 만난다.

■ 여관 – 아래꼬장골 – 윗꼬장골 – 올챙이골 – 붓고개 전설(실화)

나들목 식당 옆에 있는 산장파크 여관이다

이곳에서 직진해 조금만 가면 왼쪽에 ‘산장파크’라는 여관이 있다. 여기서 북으로 조금만 가면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 데 이 길을 따라가면 다랭이논 몇 개와 집 서너 채가 있다. 이곳이 ‘아래꼬장골’이다. 이 산 넘어 북촌3리 뜸이 ‘꽃장골’인 점을 보면 이곳의 지명이 아래꽃장골(북촌3리 같은 유래)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다시 지방도로 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집 한 채가 있고 좌측으로는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묘지가 많고 조경수를 심은 밭이 있는데 이곳을 ‘윗꼬장골’이라 부른다. 아래꼬장골의 상대적 표현이다. 다시 원점인 지방도로 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다랭이논을 따라 들어가면 꽤 큰 축사가 있다. 이곳을 ‘올챙이골’이라 하는 데 골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올챙이골과 너머인 토정리와 연결하는 고개가 ‘붓고개’다. 이 붓고개에 얽힌 전설, 아니 실화를 김옹이 얘기해 줬다.
이 마을에 사는 황석순이라는 나무 장사꾼은 부인이 성당에 나가기 때문에 아침을 늦게 줘 나무하러 가는 시간이 늦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나무를 다 하고 오는 시간이 늦어 밤이 돼서야 온다. 그러던 어느 날 붓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울면서 따라오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여자 머리는 짧은 게 유행이었다. 빨리 가면 빨리 오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오고, 열 발 가면 열 발 오고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거리 유지를 하며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런 동안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이 여자는 사라졌다. 황석순은 땀이 비 오듯 하며 밤엔 서낭당에 귀신이 있으니 절대 가지 말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 장고개 – 참나무골 – 168m 태봉산 - 7붓봉 

장고개에서 바라본 참나무골 전경이다

이곳을 나와 다시 원점인 지방도로 와서 올라가면 정상 고개 부분이 ‘장고개’다. 여기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지방도 왼쪽으로 홍산초까지 기다랗게 경지 정리한 다랭이논이 ‘참나무골’이다. 이 큰 골짜기 주변 산에 참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홍산면 상천리다.

여기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고개 서쪽 해발 168m 산이 ‘태봉산(1번 태봉산, 테뫼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남쪽 능선을 따라가다 막히는 산이자, 홍산면사무소 뒤에 있는 산인 ‘태봉산(2번 태봉산)’과 이름을 같이 쓴다. 더 놀라운 것은 1번 태봉산에서 말을 타고 군사 훈련을 했고 최영 장군도 군사시설로 활용했다는 것. 실제 산 정상부 500여평의 넓고 평평한 지대에 말발굽 흔적인 둘레길이 이를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사료에 따르면 최영 장군이 협곡에 있는 좁은 길로 말을 타고 왕래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여기서 좁은 협곡이란 앞서 칭했던 참나무골을 말한다. 이곳을 찾았던 어느 학자는 이곳이 진짜 태봉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전해진다. 또 2번 태봉산에서 1번 태봉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말을 타고 왕래했다는 것도 구전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태봉산의 위치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필요가 있다. 이 능선에는 7봉우리가 있는데 ‘7붓봉’이라고 한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마치 붓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갯마루에서 놀랍고 새로운 이야기에 아연하다.

■ 포도밭 인터뷰 

이 마을의 특산물은 주변에서 보기 드문 거봉포도다

혼돈을 뒤로하고 여기서 뒤돌아 왔던 길인 지방도를 따라 내려가면 올챙이골 근처에서 좌측으로 빠지면 포도밭이 있다.
이 포도밭에 포도 순을 정리하는 앞서 말한 김옹을 만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도밭 인터뷰가 이뤄졌다. 어찌 보면 낭만적일 것 같은 인터뷰로 보이나 특별히 앉을 수 있는 물건도 없어 일어섰다 앉았다 다리 풀기를 하며 들어야만 했다. 김삼현씨는 아예 종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괴롭히는 것은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따가운 햇볕도 한몫 거들었다. 그나마 포도밭 주인인 고령의 김옹은 포도밭에 있던 낡은 플라스틱 말 통을 깔고 앉고 모자를 쓰고 있어 다행스러웠다.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던 김옹은 말꼬가 터지더니 청산유수다. 이런 와중에 황만식 교원2리 이장도 합세했다.
1시간이상 아낌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중간 예민한 이야기가 나오면 김옹은 “내가 하고 싶어도 신문 나니까 그런 얘기 하면 안 돼”라고 만류하면서 박장대소가 터진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곳에서 북쪽으로 출발했다. 조금 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국가유공자 김규환의 집이 있고 집 앞을 지나가면 ‘참나무재’라는 협소하고 낮은 고개가 있다.

■ 하마비 - 남선매

길옆 하마비가 풀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를 넘어가 직진하면 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길옆에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란 이곳에서 말을 멈추고 내려서 말은 묶어놓고 걸어서 홍산 향교까지 가라는 의미가 있다. 시대가 변해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등이 말을 대신하고 있어 하마비 아래쪽에 주차하고 하마비 위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이 하마비도 현재 있는 자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낮은 산 끝자락에 ‘남선매(南腺梅))’라는 곳에 있었다. 남선매는 남쪽의 우물과 매화나무라는 의미로 7700여평 규모다. 일제 때 일본군이 군우마장으로 운영했다. 여기에 하마비가 최초로 있었을 것을 판단, 이곳에 말이나 소를 매 놓고 향교까지 갔다고 추론할 수 있다. 원래 이곳의 하마비는 김옹보다 더 나이 먹은 사람들이 깨부수어 물꼬에 사용했다는 것을 김옹은 봤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현재 하마비는 이후 새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다시 하마비가 있는 곳으로 와 보면 이 비는 잡초로 무성하게 둘러싸여 관리가 사실상 방치돼 있는 상태다. 현대판으로 보면 주차할 장소가 있어야 하지만, 그럴만한 면적이 이 비 근처에서는 나오지 않아 하마비의 의미도 퇴색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비가 있어야 할 장소는 향교 인근이 적임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마비의 의미에 치중해 아무렇게 방치될 바에는 차라리 관리적인 측면에서 무게를 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 홍산향교(향교골) - 청일사(서원골)
여기를 넘어가 직진하다 좌측으로 가면 ‘홍산향교’가 있다. 향교 앞 남쪽으로 형성된 골짜기를 ‘향교골’이라 부른다. 향교가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으로 향교곡, 생적굴이라고도 부른다.
향교에서 다시 왔던 길로 뒤돌아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측 언덕길을 올라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쭉 직진하면 ‘청일사’가 있다. 청일사 앞 남쪽 가옥과 논밭으로 이뤄진 골짜기가 ‘서원골’이라 부른다. 청일사라는 서원이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으로 서원곡, 청동(淸洞), 말골이라고도 부른다.

■ 마을회관 – 부자(父子) 왕버드나무 – 마을 진·출입 4개 석물

1987년에 지었다는 마을회관으로 당시 많은 사람이 견학 올 정도로 잘 지어졌다는 평이다
마을 회관에 있는 부자(父子) 왕버드나무로 사진 오른쪽이 부 왕버드나무고 왼쪽이 자 왕버드나무다
마을 진출입로에 있는 교원2리 청동마을 표지석과 홍산향교 표지판 등이 있다

이 서원에서 왔던 길로 다시 가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언뜻 보아도 범상치 않은 모습의 ‘마을회관’이 있다.
이 회관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마을은 향교와 서원이 있어 지기(땅의 기)를 다 빼앗아갔다. 그러다 보니 높은 양반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그 이하 사람들은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회관을 중심으로 물이 역류해 나가야 동네가 잘 먹고 잘산다는 속설에 따라 동네에서 30여평을 사 회관 앞에 둑을 만들고 미루나무, 소나무 등을 일부러 쭉 심어 물길을 돌아나가게 했다. 30여년 전만해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사실 현재의 이 회관은 한양수 前 지사 때 지은 것으로 1987년 무렵이다. 기존 터에 몇 필지 보태서 180평에다 연면적 50평 규모의 2층 구조로 당시에 건립했다고 보기에는 꽤 앞서간 현대식 건물이었다. 이렇게 지은 회관은 당시 충남에서 2곳밖에 없어 많은 사람이 구경 오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중 청양 사람들은 이 건물과 똑같이 설계해달라고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관 근처에는 2그루의 왕버드나무가 있다. 회관 오른쪽에 있는 것이 부(父) 왕버드나무이고 정자 옆에 있는 것이 아버지의 가지를 꺾어 꽂아서 자란 자(子) 왕버드나무다. 부 왕버드나무는 수령이 200년쯤 추정되는 것으로 옛날에는 그네를 뛰기도 하고 구렁이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네도, 구렁이도 없어 이야기의 상상만을 만들어낸다. 밑동을 보면 보통 성인 3명이 손을 잡아야 할 정도로 아주 크고 주름이 깊어 나잇값을 자랑한다. 자 왕버드나무의 태생 과정은 동네 주민이 부 왕버드나무의 가지를 꺾어 집에 가져갔는데 같은 마을 주민이 “왜 가져갔냐”라고 나무라자, 현재의 자리에 꽂아 놓은 것이 현재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수령은 50~60년 정도라고 하는데 부 왕버드나무의 덩치를 따라가기에는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향교 옆 나무와 같이 이 나무도 보호수 검토의 다툼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서원골로 난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2차선 도로와 합류한다. 여기서 우측으로 따라 남쪽으로 가면 여관 근처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이 만나는 지점에 교원2리 청동마을 표지석, 홍산향교 입구 표지석, 홍산향교 전 전교 청곡 이석재 공적비, 내산선면로 확장공사 홍산면추진회 위원장 한창옥 공로표창비 등 4개가 있어 마을의 주요 진·출입으로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거꾸로 답사를 한 셈이 됐다. 

■ 황만식 교원2리 이장
일제 때 일본은 홍산향교와 청일사의 지기를 끊고자 양쪽 산허리(장고개와 비누고개)를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향교와 서원은 이러한 풍파를 버티고 민족의 정기를 굳게 지켜낸 상징이다. 또 마을을 수호하고 홍보하는 명물로서 위상을 정립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양수 전 지사(유년기 이후)와 김준영 차관보, 영관급 군출신이 배출되기도 했다. 마을은 주위에서 보기 드물게 거봉 포도가 특산물로서 농가소득에 한몫하고 있다.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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