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몽학이 꾸었던 꿈은 무엇일까.
[기획] 이몽학이 꾸었던 꿈은 무엇일까.
  • 윤용태 기자
  • 승인 2019.08.14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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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구룡면 이몽학 생가터…이몽학과 그의 승속군을 위한 위령제 봉행
부여군 홍산면 이몽학의 반란…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 최대 사건
단순한 반란보다 반란의 원인과 명분에 접근

부여군 홍산면에서 조선 선조 때 난을 일으킨 이몽학과 그를 따르던 민초들에 대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제’를 8월13일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몽학의 난이란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 놓고 참석자들은 이몽학과 민초들의 넋을 위로하며 술 한잔 떠 올렸다
청양 향적선원 석운스님이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몽학과 민초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김정기씨 등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양 향적선원 석운스님이 위령제를 봉행했다.

먼저 위령제의 주인공인 ‘이몽학’과 그와 관련한 것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92년(선조 25)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전 국토가 황폐화가 되고 민심은 흉흉해 가고 있었다. 이때 식량을 모집하는 직책인 모속관에 한현이란 사람이 있었고 그의 부하 중 이몽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몽학은 서울에서 태어나(추정) 홍산현 구룡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서당에서 수학한 이곳의 토박이였다.

전쟁 통에 민심이 각박해지고 국기가 문란해지자, 한현은 이몽학을 꼬드겨 모반의 마음을 먹고 기회를 엿봐 모사할 것을 획책했다.
이들은 비밀결사인 ‘동갑계회’를 조직하고 여러 무리를 모아 조련해 거병하고자 했으나, 한현이 고향인 면천으로 퇴거하는 바람에 거사가 불투명했다.
하지만 이몽학은 한현을 대신해 1596년(선조 29)7월6일 홍산면 쌍방축에 진을 치자 승속군이 무려 600~700명이 모여들었다. 이날 홍산현으로 돌진해 동헌을 습격하고 다시 임천군을 함락시켰으며 7일에는 청양 정산현까지 수중에 넣는 파죽지세를 이어갔다. 당시 정산현감 정천경은 이 상황을 홍주목사에 급보고하고 도피했다. 이어 반란군은 8일에는 청양을, 9일에는 대흥을 연이어 함락시킴에 따라 그야말로 속전속승(速戰速勝)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런 수일 동안 보여준 반란군의 살벌한 기세에 수령 등 수천이 달아났다.

하지만 반란군의 승운은 여기까지였을까.
홍주목사 홍가신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성을 계획하고 홍주성 공격을 지연시키는 방책을 수립하고 만전을 기했다. 이런 상태에서 반란군은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진 못했다.
반란군과 홍주성의 대치 상태에서 충청 병사 이시언은 온양에서 홍주로, 어사 이시발은 유구에서, 중군 이간은 청양에서 홍주로 향해 홍주성 지원에 나섰다.
이몽학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11일 덕산으로 도망했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했다. 관군은 이때를 이용해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선동했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했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됐다.
 
이후 관군이 추격함에 따라 반란군을 뿔뿔이 흩어지고 무참히 살육당했다. 이 반란의 종말은 한마디로 ‘참혹’이었다. 충청도관찰사 이정암은 정산에서 80명을 임의 처형해 문책을 받은 후 사면 복권됐고 33명은 서울로 압송돼 처형됐으며 현지에서 100명이 참형을 당했다. 이것은 기록일 뿐 실제는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홍산현은 혁파됐고 도천사는 불태워졌다. 이몽학의 생가터는 파가저택 당하고 그의 친인척 300여명은 각처로 유배됐다.
아울러 이 사건의 영향은 의병장들에까지 ‘누명’이 덧씌워져 곽재우, 김덕령 등 많은 의병장이 국문을 당했고 일부는 옥사하고 처형당했다.
당시 이 반란으로 선조는 정신적 충격으로 정치적 자신감마저 잃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대 사건의 주인공인 이몽학은 ‘역적’이라는 오명으로 사서의 기록에 남아있는 관계로 역사적 조명과 고증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다만, 홍산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설화 등을 통해 그의 이름은 구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전쟁 중이고 민심은 흉악한 때였다. ‘단순한 반란’에 방점을 찍고 접근한다면 이몽학이 진짜 원했던 그 무엇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반란에 명분이 없었다면 이몽학을 많은 사람이 따랐겠는가에 의문을 던져본다. 따라서 방점은 ‘반란의 원인과 명분’에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몽학이 그의 부하에게 참수당하고 반란군이 참살당하기 시작한 날로 추정되는 423년이 흐른 8월13일, 그동안 역적으로 낙인찍혀 ‘술 한잔’ 받아보지 못한 민초들을 위해 이날 작은 위령제를 봉행하고 술 한잔 올리며 넋이나마 달래주는 시간을 마련한 것.

구룡면 구봉리 경지정리한 곳의 일부분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이곳이 이몽학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장소로 파가저택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행사 주최자인 김정기씨가 이몽학의 시 등 관련된 것을 손글씨로 써서 참석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봉행된 위령제는 이몽학의 난이 평정된 후 그의 집을 파가저택해 형성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행해졌다. 현재 경지 정리한 부분의 일부 구간에 잡초가 무성하게 난 곳이다. 경지 정리할 당시, 주최 측에서는 이곳까지 경지 정리하려 했으나 인근 주민의 벼락같은 반대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면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 참석자는 “이곳이 역적으로 몰려 파가저택한 장소이긴 하나, 이도 역사적인 장소로 안내판이라도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위령제를 주최한 김정기씨는 “모든 것에는 명분이 있다. 명분없이 난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이몽학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몽학이 꾸었던 꿈은 무엇일까.

윤용태 기자 yyt690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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